“John Deere 조파 및 파종기 _로더가있는 yanmar 트랙터 사용”

 1985년 천카이거의 <황토지>가 신중국영화의 탄생을 처음으로 외부세계에 알린 이후 장이머우의 1988년 작 <붉은 수수밭>은 전세계가 신중국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기폭제가 됐다. 서구의 관객들은 이국적이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구성에 매료됐다. 장이머우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고, <붉은 수수밭>은 그 두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으며, 오스트리아에서는 붉은 깃발을 들고 뛰는 장면이 검열에서 잘렸다 한다. 그리고 이 영화와 뒷날 만들어진 <위대한 독재자> <베르두씨>에서 보여준 비판적이며 좌파적 색채는 훗날 매카시 선풍이 할리우드를 뒤흔들 때 채플린이 미국으로부터 추방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담긴 비판의 소리는 아직도 또 앞으로도 유효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과 독립, 투쟁과 전투의 진보운동 속에서 칠레는 20세기의 파리 코뮨이었다. 말 그대로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란>에서 문제제기하고,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정식화한’ 모든 일들이 민중들의 힘에 의해 눈 앞에서 펼쳐졌다. 이것은 책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스펙터클이었다. 1972년 11월2일 아옌데 정부의 출범과 함께 진보적인 젊은 영화인들은 이 ‘위대한 사건’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영화 현장 경험이 없었으며, 또한 기자재도 부족하였다.
첫째, 어떤 성격심리학자들은 ‘우익 권위주의(Right-wing authoritarianism)’, 성실성(Conscientiousness), 개방성(Openness) 같은 성격 특성이 보수 혹은 진보라는 정치 성향을 만든다고 본다. ‘우익 권위주의’는 기존의 권위를 충실하게 따르는 한편, 관습을 거부하는 소수자들을 매몰차게 배척하는 성향이다. “결혼식장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겠다고 서약해야 한다. ”, “ ‘구시대의 방식’이나 ‘구시대의 가치’는 여전히 최선의 삶의 방도를 알려준다. ” 같은 항목에 강하게 동의하는 사람들은 우익 권위주의 성향이 높다.
  배용균은 (필자와의 매우 개인적인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세계를 ‘일요일의 리얼리즘’이라고 이름 지었다. 모두들 평일의 리얼리즘을 다룬다면 자신은 모든 규칙이 하루동안 쉬는 세상의 일상생활을 다루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것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 그 어떤 다른 변형을 가하지 않으려는 자연의 풍경과 한번도 연기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표정 속에서 끌어내려는 마음으로부터 그의 영화가 시작한다는 점에서 정말 그러하다. 그래서 배용균의 영화는 풍경과 표정 사이의 자기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데이비드 뉴먼과 로버트 벤튼의 시나리오는 아서 펜이 프랑수아 트뤼포에게서 영감을 얻어, 특히 그의 <피아니스트를 쏴라>를 생각하며 지시한 것이라고 평론가 폴린 킬은 적고 있다. 클라이드 역의 워렌 비티가 제작했다.  폭력과 시정 그리고 30년대에 대한 향수를 발라드식으로 구성한 이 작품에서 폭력은 베트남전과 무관하지 않다.  아서 펜은 이 작품의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흔들리는 대지>는 네오리얼리즘 미학의 정수를 가장 잘 뽑아낸 작품으로 꼽힌다. 영화는 아치트레차라는 어촌을 배경으로 그 마을 주민들을 연기자로 등장시키고 있으며, 대다수의 이탈리아 사람도 알아듣기 어려운 그들만의 사투리를 그대로 대사로 이용하며, 소수의 밤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연조명을 이용하고 있다.  또한 대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긴 카메라의 움직임, 실내와 외부를 연결하는 심도 깊은 공간표현 등은 이 영화의 사실성을 한껏 높여주는 기능을 한다.
[병 속에 담긴 편지]를 시작으로 [워크 투 리멤버], [노트북], [나이츠 인 로덴스], [디어 존]까지 5편의 작품이 영화화 되어 독자들은 물론 전세계 관객의 마음까지 사로잡아왔으며, 그의 새로운 소설 [디어 존]은 출간이 되기 전부터 할리우드의 수 많은 제작진들로부터 영화화 제의를 받을 정도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니콜라스 스파크스의 작품 중 국내 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감동 멜로 [노트북]은 1995년 10월 초판 이후 천 만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56주 이상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2004년에 영화화된 <노트북>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은 명작으로 꼽히며 최근 미국의 저명한 영화 사이트 movies.sky.com에서 선정한 연도별 심금을 울린 걸작 영화 50편 중 2004년을 대표하는 감동 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으로 서로 다른 두 남녀의 눈부신 사랑을 그린 작품 [워크 투 리멤버]는 ‘뉴욕 타임즈’가 집계한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17주 연속으로 이름을 올린 것은 물론 전세계에 33개의 언어로 출판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선배 프도프킨이 필름의 결합을 통해 서술적 의미의 확대와 강조를 에이젠슈테인은 두개의 대조적인 쇼트들을 통합해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다. 코사크 병사가 내리치는 칼, 깨어져 뒹구는 안경, 피 흘리는 여인 얼굴의 클로즈업…. 이런 편집을 통해 에이젠슈테인은 상황묘사라든가 감정의 고조를 넘어서서 관객들에게 단호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논리로 떨쳐나갔던 것이다. 물론 그는 이 오데사 계단 장면뿐만 아니라 많은 장면에서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크기로 쇼트들을 찍었다. 그는 찍힌 것을 어떻게 편집하느냐가 영화 창작의 처음이자 출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주선 디스커버리호의 통제컴퓨터 핼(철자로는 HAL이지만 발음은 마치 ‘지옥’처럼 들린다)은 자신의 기능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고 조그만 실수에도 그것을 수치로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주비행사 데이브에 의해 해체되어 갈 때 핼은 ‘데이지’를 부르며 죽어간다. 그는 일면 빅 브라더였으면서도 프랑켄시타인이었던 것이다(HAL의 철자 하나씩을  뒤로 넘기면 IBM이 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또한 과학문명의 발달은 곧 ‘커뮤니케이션’의 발달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데 큐브릭은 이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이  발달할수록 ‘간접적’이 되며, 그에 대한 신뢰가 커질수록 진실은 왜곡되기가 쉽다고 본다. 여기서 21세기의 많은 사람들은 통신수단을 통한 간접적인 커뮤니케이션만을 행하며, 또한 핼은 절대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완벽한 컴퓨터라는 절대적인 신뢰가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을 낳고 불행한 사고를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점차 간접적으로 변해가는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인간적 유대관계는 점차 상실돼 가는 것이다.
한편 두 사람이 일적인 정보를 공유하거나 의견을 나눌 때 언급되는, 유명인과 관련된 비화는 책 읽기에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사뮈엘 베케트의 조카이자 조력자인 에드워드 베케트, 가족과 마찰을 일으킬 만큼 유별난 프란츠 카프카의 식성, 세계적인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 세계 무역 센터의 두 빌딩 사이를 줄타기로 건넌 괴짜 예술가 필리프 프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수업 방식 등이 인상적이다.
한 사람의 허구의 세계에 휴대 전화가 있는지 없는지는 사소한 문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과거와 현재, 소설의 역학 중 상당수가 등장인물들에게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든가, 그들이 정보를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든가, 사람들을 같은 방에 모이게 하거나 떨어져 있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갑자기 모두가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 말하자면 전자 기기로 접속한다면 ― 극적 구성은 다 어떻게 될까요? 본문 295~ 296면
《우연의 미학》이라는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재담가 폴 오스터와 서구 문명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과 탁월한 상상력으로 200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J. M. 쿳시. 두 사람의 만남은 세간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삶의 비극에서조차 유머를 발견하는 다정함과 지치지 않는 열정을 겸비한 오스터와 10년간 그가 웃는 것을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라 동료가 진술할 만큼 진지하고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인 쿳시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짝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든 두 작가는 편지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논하며 깊은 우정을 나눈다. 『디어 존, 디어 폴』은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쿳시의 사생활과 생생한 육성을 담고 있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때로 남모를 고충을 겪은 오스터의 인간적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러한 미학의 성취를 위해 로샤는 브라질의 다양한 민중문화적 요소들 – 민중종교, 신화, 전설, 음악 – 을 영화로 끌어들인다. 억압에 대한 영원한 반항인 동시에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양면성을 가진 민중문화로부터 로샤는 진보적인 힘을 끌어내고자 시도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죽음의 안토니오>다. 영화는 가뭄과 빈곤의 땅인 브라질 북동부 황야를 배경으로 한다. 거기엔 억압받고 무력한 민중이 있고 그들의 편엔 천년도래를 전파하는 성녀와 의적의 무리가 있다. 그들 반대편에는 농지개혁을 반대하며 농민을 착취하는 눈먼 지주가 있고 그의 정부가 있고 그를  보좌하면서 황야를 산업화하고 외국자본을 끌어들이자고 주장하는 하수인이 있다.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인물로 알코올에 찌들어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교수가 있다.
  지나치게 중생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그러나 잠깐. 여기서 배용균이 대답하지 않지만 그의 질문이 끝난 것은 아니다. 두번째 영화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95년)은 화두에 이은 그의 사바세계의 밤으로의 산책이다. 그는 우리의 세계 속으로 비행하고 있으며, 한국영화는 배용균을 통해서 또 하나의 리얼리즘의 계보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세번째 영화까지 다시 5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월간 <키노> 편집장>
  측량기사 출신인 플래어티는 광물탐사를 목적으로 캐나다 북부지방을 여행하며 에스키모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탐사작업 틈틈이 에스키모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던 것에서 출발해 그는 그들의 삶을 영화로 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플래어티 연구가들에 의하면 그는 처음부터 이 영화를 장편으로  만들어 극장에 배급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플래어티는 오늘날 독립영화작가들의 원형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피자집 종업원 무크로 출연한 이 영화의 감독 스파이크 리는 일종의 메신저처럼 각기 다른 인종의 입장을 피자를 배달하듯 관객들에게 전한다. 그 전언에 따르면, 증오범죄적 태도로부터 자유로운 인종은 없다. 백인경찰, 흑인계, 이탈리아계, 한국계 모두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저주한다.  저중산층 유색인종들이 백인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인종차별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피라미드식으로 재생산하는 셈인데, <똑바로 살아라>에서 흑인과 이탈리아계의 대립은 결국 방화, 구타 그리고 살인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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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치콕의 이런 반페미니스트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 곧 죽음의 충동에 대한 이야기를 은밀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이있는 이해와 통찰을 요구한다. 카를로타와 마들린으로 대변되는 죽음에의 욕망은 그에게 이끌리는 스카티의 심리상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이처럼 은유적이고 우회적으로 묘사한 영화는 찾기 힘든다(물론 여성이 환상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이미지로 묘사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의 또다른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 관음주의와 환상주의 그리고 죽음에의 충동을 짜맞추어 나가는 할리우드의 프로이드 히치콕의 세밀한 연출기법은 범접하기 힘든 개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영화적 형식의 탁월함은 두고두고 논의의 대상이 된다. 이를테면 4번에 걸쳐 사용된 줌과 트랙의 결합장면은 주인공 스카티의 고소공포증을 묘사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고, 스카티의 시점에 관객을 동일화하기 위해 사용한 주관적 트래킹 숏은 이제는 영화문법의 고전처럼 이야기된다.
  르누아르로부터 일상적 삶의 시각적 표현에 대한 열정을, 히치콕으로부터 영상의 힘과 감각을 배운 호모-시네마티쿠스 트뤼포는 이러한 그의  주제의식을 때로는 서정적 스타일로 또 때로는 낯선 사진적 효과와 편집효과(스톱 프레임, 스위시 팬, 점프 컷 등)로 엮어나간다. 말하자면 대중성을 충분히 갖추면서도 누벨바그의 실험적 정신을 잃지 않는 조화로움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쥘과 짐>은 누벨바그 영화를 따분하게 생각하는 대중들에게조차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다. <필자: 김지석/영화평론가·부산예술학교 교수>
  장르-스타-스튜디오 시스템의 공식으로 운영되던 할리우드 영화는 급격한 사회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발표된 1967년은 ‘혁명의 해’로 불릴 만큼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메리칸 뉴 시네마는 또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60년대 젊은이들의 복잡한 감정을 영화로 담아낸 결과였다. 
  브로드웨이의 젊은 극작가 바톤 핑크는 할리우드의 초청을 받아 로스앤젤레스에 온다. 바톤은 도착하면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정황들과 연속적으로 마주친다. 지옥으로 가는 관문 같은 기괴한 분위기의 호텔, 할리우드 사람들의 미치광이 같은 생활양식, 그곳에서 폐인이 돼버린 대작가 등. 이런 상황에서 하룻밤 같이 잔 여자는 자신의 침대에서 피투성이로 죽어 있고, 친구로 여겼던 뚱뚱한 남자가 여자를 죽인 미치광이 살인광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에필로그. 16개의 쇼트로 구성된 흑백 장면과 속을 뒤집어 놓는 음악. 대부분이 풀 쇼트이거나 그보다 크다. 임대주택 단지의 겨울 나무들을 훑는 롱 쇼트 한 개를 빼고는. 서로가 속는 체하며 위로를 주고받는 흑인 할머니와 오기. 마지막, 오기가 카메라를 들고 문을  나설 때 고리를 여는 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는 살아난다. 질문에서 주장으로, 운문에서 산문으로 이동한다. 여균동에게서 인용하자면, 인간의 시선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변할 것이고 살 만하다. 바로 그 얘기다. <필자: 이효인/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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