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rm 트랙터 경매 -중고 겸용 트랙터을 (를) 검색 할 수 있습니다. 사용 된 중고 트랙터”

  포머의 그런 결정은 이 영화의 해석에 흥미 있는 변수가 된다. 원래 각본의 의도는 어쩌면 개인의 자유가 폭정적 권력에 의해 남용되는 것을 비판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는 폭정적 권력이 어쩌면 개인들에게 유익할지도 모른다는 시사를 한다. 이는 당시 독일인물의 의식 저편에 있는  불안과 공포심을 암시한 것이며, 칼리가리라는 인물을 통해서 히틀러의 등극을 예시했다는 이 영화의 의미를 명확히 해준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
 <황토지>는 현대 중국영화의 분기점을 이루는 ‘시대의 영화’이다. 1930년대부터 문화혁명 직전까지 중국 영화계의 지도적 존재였던 문예활동가 시아옌은  문혁기의 영화에 대해 한마디로 ‘무’라고 표현했다. 중국영화가 문혁의 상처에서 벗어나 정상적 궤도에 진입한 것은 1978년 무렵이다. 이 때의 흐름은  숱한 정치투쟁의 상처와 회한을 고발한 감상적인 상흔영화들이 주도하였다. 셰친의 <천운산 이야기>가 대표작이다.
  <제3의 사나이>는 49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 국제적인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영화적 깊이나 미학적 실험은 없지만, 마치 홀린 듯이 안톤 카라스가 연주하는 민속악기 지타의 선율을 따라 빈에서 펼쳐지는 이 영화는 수많은 명장면과 전율할 만한  이미지의 황홀감을 안겨준다. 특히 가을 낙엽이 지는 빈의 가로수 저편에서 걸어와 기다리는 홀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안나와의 기나긴 이별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의 하나이다. 영화는 때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명장면의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다. <제3의 사나이>는 추억과 감상주의 사이에 선 아슬아슬한 기억이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그러나 자무쉬 영화의 새로움은 유럽영화에서는 이미 상투화한 진술을 미국의 상황으로 옮겨놓은 낯설음에서 온다. 예를 들면 에바와 에바의 사촌 오빠 윌리가 식탁에서 TV 디너에 관해 대화하는 장면같은 것이다. “티브이 디너 안먹을래?” “안먹어, 배 고프지 않아.” “왜 티브이 디너라고 부르지?” “그냥… 티브이를 보면서 먹으니까… 텔레비전말이야.” “텔레비전이 뭔지는 나도 알아.” “그 고기는 어디서 난거야?” “뭐?” “그 고기는 어디서 난거야?” “쇠고기지 뭐.” “쇠고기야? 고기같이 보이지 않는데.” “휴… 상관하지마. 어쨌든 여기선 이런 걸 먹는다구. 고기, 야채, 디저트, 그리고 설거지할 필요도 없어.” 이런 식의 반복된 대화의 연속과 단조로운 양식은 황폐한 미국생활을 암시하는 놀라운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 장 뤼크 고다르의 선언은 ‘새로운 영화’의 명제가 되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고전적 양식을 완성하였고(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그리고 장르 영화들), 이탈리안 네오 레알리슴은 부패하기 시작하였고(펠리니, 안토니오니, 비스콘티), 프랑스영화는 문학의 진부한 재각색(르네 클레망, 앙리 조르주 클루조에서 알랭 레네까지)에 사로잡혔다. 영화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제 영화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결별(!)이 필요했다.
두 발로 대지를 굳게 밟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당신의 삶과 역사를 응시하라고. 안이한 영화 습관,  잘못된 인생관을 잘라버릴 자객의 칼이 없이 영화를 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비수처럼 박히는 불가의 화두. 마음이 거세된 모든 것은 허상이다. 허우샤오시엔을 만나면 허우샤오시엔을 죽이리라. <비정성시>를 만나면 <비정성시>를 죽이리라, 아니… 영화를 만나면 영화를 죽여라! <필자: 조재홍/영화평론가>
한 사람의 허구의 세계에 휴대 전화가 있는지 없는지는 사소한 문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과거와 현재, 소설의 역학 중 상당수가 등장인물들에게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든가, 그들이 정보를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든가, 사람들을 같은 방에 모이게 하거나 떨어져 있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갑자기 모두가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 말하자면 전자 기기로 접속한다면 ― 극적 구성은 다 어떻게 될까요? 본문 295~ 296면
  자극적인 기억을 남겨준 이 영화의 시작은 동화 같다. 황량하고 드넓은 감자밭에서 촌부가 군감자를 호호 불며 먹고 있다. 한 남자가 경찰을 피해 달려오고 있고 그는 여자의 네겹 치마 속에 피신처를 구한다. 여자는 그를 깔고 앉아 경찰을 따돌려주고 남자는 치마 속에서 바지앞춤을 여미며 나온다. 그렇게 잉태된 이가 주인공 오스카의 엄마다. 오스카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유래를 아주 자랑스럽고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올란도>는 4백년을 산 그/녀의 이야기로 양성성의 문제를 알레고리적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제목 ‘Orlando’ 자체가 영화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암시하고 있는데 ‘혹은, Or’ 또는 ‘그리고, and’를 섞어 붙인 주인공의 이름은 남성 혹은 여성, 또는 남성 그리고 여성인 주인공의 이름으로서는 매우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복장 전환과 전도를 통한 양성적 실험을 하면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예시적으로 보여주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가장무도회에 초대받은 것 같은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무도회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기존의 여성성/남성성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앨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해 저마다 엇갈리는 현지의 평은 놓치지 말아야할 부분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존 레전드와 루츠의 기본 ‘클래스’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호평을 늘어놓은 매체도 적지 않다. 반면 한편에서 존 레전드가 ‘거장들의 소울’을 제대로 소화해낼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거나, 앨범 콘셉트와 메시지가 진부하고 과잉이라거나, 고민과 성의가 부족한 속빈 리메이크 작품이라는 비판 역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